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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바로 압시다
2021-07-17 22:47:28 강동열목사 37  
 

교회를 바로 압시다.

에베소서 1:22-23

* 여자가 쳐다보면 자기한테 호감이 있는 줄 안다. 나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해서 자기를 싫다고 하면 한번 튕기는 거라고 여긴다. - 남자들의 착각 / * 남자가 먼저 말을 걸면 자기한테 관심 있는 줄 안다. 남자가 자기와 같은 방향을 걸으면 관심 있어서 따라오는 줄 안다. - 여자들의 착각 / * 자기가 서울대 갈 수 있을 줄 안다. - 초딩의 착각 / * 앞사람 등 뒤에 숨어서 잘 때 선생님이 안 보이면 선생님도 자기를 안 보는 줄 안다. - 중고딩의 착각 / * 우리 애는 정말 착한데 친구를 잘못 만나서 삐뚤어진 줄 안다. - 세상 엄마들의 착각 / *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는 아닌 줄 안다. - 우리 모두의 착각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참 많은 착각에 빠져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착각은 신앙생활에서도 존재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나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런 착각에 빠져 살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수백 항목이나 되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았기 때문에 자기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착각을 경고하시며 그들의 율법주의를 책망하셨습니다.

율법주의란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맹목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태도를 말합니다. 결국 율법주의는 하나님 없이 율법만 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착각이 오늘날 우리와 교회 안에도 존재하는데, 그 대표적인 착각이 우리 교회는 당연히 주님께서 처음 디자인하셨던 바로 그 교회, 그래서 가장 좋은 교회라는 맹목적인 확신입니다.

벨직 신앙고백서의 표현에 따르면 교회를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혹자는 열심히만 다니면 되지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를 구분해서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참된 교회에만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참된 교회에서만 그리스도는 자신의 백성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신앙의 모든 여정을 주관하십니다.

그래서 칼뱅은 하나님께서 아버지기 되시는 자들에게는 교회가 또한 그 어머니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신자들에게 중요한 구속 기관이 교회인데, 그렇다면 참된 교회는 무엇이며, 참된 교회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참된 교회가 아닌 것들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생선회를 어떻게 뜨느냐고 묻기에 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싱싱한 생선을 도마에 올려놓고 칼로 생선살이 아닌 것만 제거하면 됩니다.” 이 원리를 성경이 말하는 바른 교회에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성경이 교훈하는 참된 교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참되지 않은 교회의 모습을 버리면 됩니다.

이 목적을 위해 버려야 할 고정관념은 교회는 장소나 건물의 규모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장소나 건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는 모일 장소가 필요하고 성도의 교제를 나눌 공간이 필요합니다. 종종 교회의 영적인 부분만 지나치게 강조하여 교회 건물 무용론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자연법칙에도 어긋나고 공정하지도 않은 어리석은 비판입니다.

삭막한 도시 생활을 하는 금당과 신대지구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 예배당이 주는 유익은 매우 큽니다. 주차가 자유롭고 특히 새벽기도에 와서 마음껏 기도하고 밖에 나와 식물들을 바라보며 힐링할 수 있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화평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 심지어 밤중에 화평이가 보고 싶어 교회에 오는 청년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은 공간의 존재입니다. 아담에게도 에덴동산이라는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요즘 들어 카페가 성행하는 이유도 단순히 커피를 마시기 위함이 아니라, 아파트 문화에 식상한 이들이 좀 더 안락하고 정서적으로 여유로운 공간을 찾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 공간과 건물을 안락하고 아름답게 꾸며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엄밀하게 말하면 공간이나 장소나 건물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예배당이 크다고 교회가 큰 것도 아니며, 대도시에 있다고 교회가 세련된 것도 아닙니다. 또한 교회는 모이는 숫자나 재정에 의해 정의되지도 않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교회가 이렇게 눈에 보이고 계량되는 것들로 오해되기 시작했을까요?

성경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그의 고백 위해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서 교회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에클레시아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종교적인 용어가 아니라, 공무의 목적으로 소집된 시민들의 모임이나 군사적 목적으로 불려 나온 군인들의 모임을 뜻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특별한 장소나 건물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위해 불려 나온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 것이며 이 새로운 모임의 기초는 바로 예수님이시다라고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오류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에서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까지 교회의 모임은 불법이었습니다. 황제들은 자신이 아닌 예수를 주인으로 믿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모이지 못하게 하고 죽이고 그들의 거처와 재산과 지위를 박탈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교회는 존재했습니다. 아니 더욱 왕성해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 공인 후에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황제를 따라 신앙을 고백하게 되면서 교회는 기득권층이 되었습니다. 위상이 높아지면서 교회와 예배는 점점 격식을 갖춰 갔습니다. 큰 건물, 화려한 복장과 성가대, 거창한 장식 등이 생기며 마치 황제를 숭배할 때처럼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황제와 귀족들의 예배에서 일반 회중은 소외되어 구경꾼이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죽어갔던 많은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자 그들의 이름으로 기념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개념은 회중이나 모임에서 건물이나 장소로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임을 뜻하는 에클레시아에서 공공건물이나 공식 집회장을 뜻하는 바실리카가 되어 간 것입니다(사진). 바실리카(basilica)란 말은 게르만 문화에서 키리카’(kirika)라고 불렀는데, 훗날 독일에서 키르케’(kirche)로 바뀌었고, 여기서 영어 단어 처치’(church)가 파생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이나 유럽에서 교회는 장소의 개념으로 더 넓게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잘못된 개념에 대해 개입하기 시작하셨습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습니다. 위협이 가시화되자 기독교 학자들은 급히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된 고대 사본들을 가지고 유럽으로 피난을 갑니다. 이 사본들을 교회 개혁자들이 보통 사람들도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을 시작합니다. 존 위클리의 영향을 받은 위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년 웨일스 슬림브리지 출신)이 헬라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에클레시아회중’(congregation)이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교회가 장소나 건물이 아닌,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점을 복원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틴데일은 성경을 번역한 죄로 체포되어 1536106일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거짓 교회 지도자들이 왜 이렇게 교회를 장소가 아닌 사람으로 표현한 개혁자들을 박해했을까요? 그것은 교회의 장소 개념이 약화되면 교회에 대한 지배력이 흔들리기 때문이었습니다. 장소는 인간이 지배하거나 통제하기 쉽지만, 모임의 공동체는 통제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이 본래 사용하신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단어가 건물을 의미하는 단어로 대치되면서 그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시금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따라 본래의 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묻고 답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에클레시아인가 키르케인가?”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 못하면 건물에 불과한 교회로 끝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 삶의 머리가 되어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마땅히 멀리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그런데 주님의 다스리심이 교회 건물 안에만 제한되고 밖에 나가서는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으로부터 분리된다면 이는 온전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건물의 개념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라고 하는 장소를 넘어서 어디를 가든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B. 매력적인 공동체

불과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우랑아 선발대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수상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제법 포동포동한 아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웰빙에 관심이 높아진 지금은 우량아라는 말 자체가 없어졌을 뿐더러, 자기 자식이 그렇게 되면 오히려 걱정스러워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한때 양적 성장에 주력하면서 모든 목회자 세미나가 양적 성장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제자훈련 세미나마저도 교회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이해하여 수많은 목회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대형교회들의 부작용을 보면서 그 반작용으로 웰빙 교회의 중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교회인가가 아니라 어떤 교회인가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교회마다 각각 자기만의 색깔을 고민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목회자들이 보는 잡지에 등장하는 교회들은 작지만 자기 색깔을 가지고 마을을 섬기는 카페 교회, 좋은 떡이나 음식을 만들어 팔며 복음 전하는 교회, 예배당을 공유하는 플랫폼 교회 등이 속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식혜 교회가 생겨날지 모릅니다.

아무튼 교회도 세상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매력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 구원 받은 사람들이 더해진 것도 세상 사람들에게 매력을 어필했기 때문입니다. 매력적인 성전을 건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초대교회는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었을까요?

초대교회의 매력은 그들이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순결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착한 행실이 초대 교회가 가진 매력이었음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매력적인 교회의 모습은 초대교회가 지나 4세기 기록에도 나타납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승인하던 당시 그리스도인은 당시 인구의 10%를 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국가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업을 수행할 때 그리스도인을 통해 시행했습니다. 믿고 맡길만한 거룩함과 나라를 움직일 만한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유일한 비그리스도인 황제여서 배교자라는 별명이 붙은 율리아누스는 이교도를 부활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그리스도인의 매력만큼은 인정하며 이교의 제사장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이교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본받으라기독교는 이러한 매력 때문에 아주 짧은 시간에 전 유럽으로 학장될 수 있었습니다.

심리 마케팅 연구에 의하면, 매력적인 브랜드는 무의식적으로 쾌감중추를 자극한다고 합니다. 소비자들은 블라인드 테스트를 할 때는 코카콜라와 펩시폴라 중 펩시콜라를 선호하지만, 브랜드를 알고 난 뒤엔 코카콜라를 압도적으로 선호한다고 합니다. 매력적인 브랜드의 힘입니다.

성령의 임재가 강력했던 초대교회 공동체는 누가 뭐래도 매력적인 공동체였던 것처럼, 우리 교회 또한 믿는 자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매력적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매력적인 교회의 핵심은 바로 성도 각자의 성숙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눈길이 머물지 않는 교회는 매력을 잃은 교회입니다.

우리 각자가 성령 안에서 성숙하여 매력적인 성도가 되고, 매력적인 교회가 되기를 힘씁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웃들이 아름답게 변화되는 매력적인 모습을 바라보면 무의식적으로 영적 중추신경이 자극을 받아 교회를 향해 몰려오는 날이 반드시 다가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C. 성령의 역사를 따라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공동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교회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시작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박해 가운데서도 성령이 함께 하시는 교회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성령이 일하시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복음으로 인해 손해나 박해 받는 일이 없는 오늘날의 성도의 삶 속에서 성령께서 원하시는 역동적인 복음 전도가 잘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동안 우리가 오해했던 몇 가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먼저는 너무 무례한 전도 방식으로 인해 성령의 일하심을 가로막았습니다. 복음을 듣는 분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전도를 하다가, 상대방이 거부하면 버럭 화를 내고 가버리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전도가 자기 의가 되어 자기만족에 그친 것입니다. 오랫동안 지속하는 선한 행실을 통해 땅을 기경하지도 않고 씨를 뿌리는 일에만 열중하는 무례한 전도가 사람들의 마음을 닫게 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삶만 올바르면 굳이 말로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가 성령의 일하심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복음의 본질은 우리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복음을 프레젠테이션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분명 어느 시점에서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을 말로 직접 선포해야만 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성령 받은 이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성령이 임한 초대교회는 입술로 주님을 증거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고,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역시 입으로 복음을 증언하다가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임한 증거입니다.

그러니 삶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무음으로 TV를 시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방송 화면에 나오는 이들의 표정과 몸짓으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정작 필요한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내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특히 앞으로 다가올 재앙을 예고하며 대처하는 방안을 알려주는 방송이라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너그럽고 자비롭고 신실하고 희생적인 삶이 복음 전파를 효과적으로 돕긴 하겠지만, 복음의 선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 복음을 알지 못하고 진리의 기준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소리 높여 알리는 주님의 스피커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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