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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2022-07-24 00:22:25 강동열목사 91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요한복음 13:36-38

매년 성탄절이 되면 <벤허> <십계>와 더불어 자주 방영되는 <쿼바디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흔히들 이 세 작품을 가리켜 기독교 3대 영화라고 부릅니다. 그 가운데 <쿼바디스>1905년 노벨상을 수상한 폴란드의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가 1895년에 쓴 소설 <쿼바디스>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1951년에 거장 머빈 르로이 감독이 처음 영화환 것을, 2004년에 카발레로비치 감독이 리메이크했습니다.

쿼바디스는 라틴어로서, ‘쿠오’(Quo)어디에라는 뜻이고, ‘바디스’(Vadis)가십니까’, 도미네(Domine)주여라는 뜻입니다. 이 제목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36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렸던 질문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13:36a)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 역사 소설은 로마의 네로 황제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귀족 청년 비니키우스와 그리스도인 여인 리기아의 사랑 이야기를 줄거리로 해서 당대 로마 제국의 퇴폐상과 로마의 대 화재에 이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 그리고 그 시대적 상황 속에서 베드로의 순교와 네로의 몰락을 그린 영화입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 베드로입니다. 그는 언제나 예수님의 제자들 명단에 첫째로 등장합니다. (10:2-4) “(2)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지난 시간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는 절대로 자신의 발을 씻으실 수 없다고 거절하다가, ‘그러면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럼 아예 목욕을 시켜 달라고 급변하는 다혈질의 감정적인 사나이였습니다. 그는 칭찬과 조롱, 사랑과 미움, 존경과 야유를 함께 받는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는 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질문을 가슴에 묻어 둘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말하고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대하여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여 네가 복이 있도다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지만,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말씀에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말렸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는 책망을 받기도 했습니다(16:16-23).

또한 한밤중에 폭풍 이는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다른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소리치며 두려워할 때 바다 위를 걸어오는 이가 예수이심을 확인하고는 즉시 바다에 발을 내밀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었지만, 예수께서 붙잡혀 가시자 일개 여종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한 비겁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세 가지 모습으로 변신할 것을 예언하십니다. 오늘은 베드로처럼 우리에게 드러날 수 있는 세 가지 얼굴을 직면해 보고자 합니다.

A. 지금은 따라올 수 없는 베드로(36, 38)

먼저, 지금은 예수님을 따라올 수 없는 베드로입니다. (13: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베드로의 영성과 영적 실력이 아직은 주님을 온전하게 따라올 정도의 성숙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38절의 예언이 따라온 것입니다. (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의 영적 성숙은 잠시 후,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 주님을 모른다고 쉽게 부인할 정도로 아직은 연약한 신앙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베드로였지만, 주님의 교훈을 아는 것과 주님을 따르는 것에는 아직 차이가 컸던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훈을 머리로 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잘 따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별개입니다. 야고보서의 중요한 주제가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행함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이 과연 그를 구원할 수 있는가를 물으면서 한 가지 예를 듭니다.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니 기독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머리로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기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교훈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한 분임을 아는 지식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야고보는 이런 신앙을 가리켜 귀신들과 동급 수준에 불과하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영적인 존재인 귀신들이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심지어 알고 떨기까지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 내린 무당들은 진정한 예수쟁이들이 곁에 있으면 굿이 되지 않는다며 밖으로 나가라고 합니다. 그들도 자신이 섬기는 귀신이 예수님 앞에서는 맥도 못 추는 미미한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베드로의 신앙은 행함으로 증명할 수 없는 귀신들의 믿음 수준에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알기만 할 뿐 온전히 따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평안한 순종의 자리에서는 얼마든지 예수님의 제자임을 자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겪어야 하는 불편이나 고난, 박해나 역경을 직면할 용기가 없는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직은 주님을 따라올 수 없는 베드로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행하는 것에 일치되지 않는 베드로의 연약한 믿음이 바로 오늘 나의 믿음의 얼굴은 아닌지 살펴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B. 육신의 연약함을 직면해야 했던 베드로(37)

베드로가 가졌던 두 번째 믿음의 얼굴은 육신의 한계에 머물렀던 연약한 믿음입니다. (13: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여러분은 이 구절에서의 베드로의 결기 어린 고백이 진정한 것이었다고 믿으십니까? 저는 진정성이 있는 고백이었다고 믿습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 베드로는 육신의 연약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도 자신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자기 스승을 부인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건을 앞에 두고 한 시간이라도 깨어 함께 기도하자고 부탁하셨건만,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flesh)이 약하도다 베드로는 연약한 육신의 한계를 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에서 주님께서 육신을 언급하시면서 헬라어 사르크스’(sarks, flesh)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육체를 의미하는 소마’(soma, body)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피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르크스는 보다 총체적인 인간성의 본질, 특히 타락한 인간성의 본질(sinful nature)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로마서에서 이런 육의 본질을 신랄하게 파헤칩니다. (7:18) “내 속 곧 내 육신(flesh)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바울은 여기서 타락한 인간 내면의 정체인 육신의 본질, 곧 죄성(sinful nature)이 어떤 것인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간이 굉장히 선한 능력을 가진 존재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요, 잘못된 진단입니다. 어쭙잖은 인간들은 여전히 인간의 능력과 힘으로 세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속인 거짓이었음이 지난 1세기의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역사가 리얼하게 증명했습니다.

지난 수요일 예배 시간에도 잠시 소개했던 내용입니다. 20세기 초, 러시아는 인간의 영적 부패와 선에 대한 전적 무능을 도외시하고 육신의 힘으로 지구상에 프롤레타리아 즉 무산자들의 지상낙원을 만들겠다며 공산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98퍼센트에 이르는 교회를 무너뜨렸고, 42,000명의 성직자를 죽였습니다. 일부 대형 성당을 무신론 박물관으로 꾸몄으며, 동네 교회들은 아파트나 헛간으로 개조했고, 어린이들에게 신앙 교육도 금지시켰습니다. 스탈린 치하의 유치원 교사들은 어린아이들에게 눈을 감고 하나님께 사탕 봉지를 구하는 기도를 하라고 시킨 다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으면 다시 구하게 했습니다. “이제 스탈린 동무에게 기도하세요.” 그리고 아이들이 기도하는 동안 각자의 책상에 사탕 봉지를 올려놓았습니다.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기도는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말을 반복시켰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에 유토피아가 건설되었나요?

그 이후 75년 동안 구소련에서는 끔찍한 역설이 실현되었습니다. 공산 정권은 6천만 명이나 넘는 자국민들을 온갖 죄목으로 숙청하고 처형했습니다. 당시 러시아 남성 절반이 전쟁, 기근, 처형, 투옥으로 사망했습니다. 거대한 경제가 무능으로 무너졌고, 평균 수명, 영양 상태, 질병, 빈곤율 등 모든 지수가 세계 최하위 권으로 추락했습니다. 이혼율은 70퍼센트에 달하고, 여성들은 평균 4차례의 낙태를 경험했습니다. 80년대 말 소련 공산권이 무너진 것은 단순히 미국과의 무리한 군비경쟁 때문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도덕성이 무너지고 타락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육신의 연약함을 무시한 죄인들이 고안해 낸 정치가 만든 비극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성에 대한 중대한 오해를 일찍이 깨우친 선각자들이 있는었데 그들이 바로 종교개혁자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total depravity)라는 사실입니다. 개혁자들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은 하나님 어떤 선도 행할 능력이 없는 존재라는 자각이었습니다.

특히 종교개혁자 칼뱅이 깨달은 인간 구원의 5대 교리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궁극적 구원(Perseverance of the Saints)이 그것입니다. 이 내용을 첫 글자를 따서 튤립(tulip)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진리를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큰소리를 친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37b) 육신의 힘으로 넉넉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충성을 맹세를 한 이유는, 진짜 자신이 어쩐 존재인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테스 형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이런 대답이 돌아올 것입니다. “네 자신을 알라육신의 힘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하는 거짓 믿음에 스스로 속지 마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C. 후에는 주님을 따라오게 될 베드로

그러나 주님은 결코 베드로를 향하여 비관적 예언으로만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36절 마지막 부분을 함께 읽겠습니다. 후에는 따라오리라”(but you shall follow afterward) ‘will’이 아니라 ‘shall’입니다. 그냥 스스로 그렇게 될 것이 아니라, 말씀하는 자의 의도대로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베드로의 희망이 있고,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믿음에 자주 넘어지는 우리들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지만, 그것이 베드로 인생의 결론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서 베드로는 주님을 배신했던 자리에서 빠져나와 재기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후에는 따라오리라는 예언을 이룰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여기서 대조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젊어서는늙어서는입니다. 한마디로 젊었을 때는 네 맘대로, 네 육신의 생각대로 살았지만, 늙어서는 네 맘대로 살지 못하도록 내가 너를 붙들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런 첨언을 남겼습니다.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무슨 뜻입니까? 예수께서 베드로의 인생의 결론이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죽음일 것을 아시고, 이전에 실패했던 육신에 방법이 아닌 당신의 도우심을 힘입어 온전히 따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많이 알려진 교회의 전승과 영화 <쿼바디스>에 소개된 베드로의 말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네로가 로마 시가지에 대 화재를 일으키고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가해서 박해가 시작될 때, 베드로는 신자들의 만류로 잠시 로마를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피난길을 따라 아피안 언덕을 넘어갈 무렵, 그는 이른 아침 동편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빛 가운데서 길을 거꾸로 걸어오는 누군가를 보게 됩니다. 자세히 보니 주님이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쿼바디스 도미네) 이에 예수님께서 나는 네가 버리고 떠나는 양들을 위해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고자 로마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로마로 되돌아갑니다. 그곳에서 베드로는 주님은 십자가에 바로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자신은 그렇게 죽을 수 없다며 자원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한 것으로 교회 역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마지막 인생이 승리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고 결국엔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자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마침내 후에는 따라오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성취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주님을 온전히 따랐던 베드로처럼, 우리 역시 성령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면서 하나님나라에 이르는 그날까지 온전히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결론

요즘 우리 교회 중고등부 교사들과 부모님들의 피가 바짝바짝 마르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여름 수련회에 참석시켜서 은혜를 체험하게 해야 하는데, 문제는 아이들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머리로만 아는 아이, 하나님 없이도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버티는 아이들 때문에 부모님과 선생님의 속을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열심히 설득해서 수련회 참석 등록까지 해 놓았는데, 그 기간에 친구들과 놀러가기로 했다는 자녀 때문에 그 엄마가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그 친구는 하도 선생님이 설득을 하니까 7년 동안이나 교제했던 선생님 전화번호를 삭제해버려서, 선생님으로 하여금 베드로의 배신 때문에 마음 아파하셨던 예수님의 심정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엄마가 신앙 관련 영상을 보내주자 엄마, 안 믿어지는데 뭐 하러 보내세요.’라는 답장을 보내온 자녀도 있습니다. 어쩌다가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이 이렇게 초반의 베드로를 닮아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마십시오.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예언이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임할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에 20명의 훗날의 베드로들이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우리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제자들로 세워질 줄을 믿습니다. 그 날이 이르기까지 포기하지 말고 무엇보다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께서도 연약한 베드로가 흔들릴지언정 아주 믿음에서 떠나가지 않도록 기도하셨거든요.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이 온전히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본을 보이십시오. 자녀는 부모의 걸음걸이를 보고 걷는 법을 배운다고 하지 않습니까? 절망하지 마십시오. 베드로를 다듬고 만들어서 초대교회 초석으로 사용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우리 자녀들 모두를 후에는 따라오리라는 당신의 약속을 반드이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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