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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을 이기는 비결
2022-07-30 22:05:50 강동열목사 47  

 

근심을 이기는 비결

요한복음 14:1-6

요즘 한창 휴가철입니다. 다니던 직장을 잠시 떠나서 휴식을 취하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집을 떠나 강이나 해변을 찾아가서 휴식을 즐기는 바캉스가 있습니다. 바닷가나 계곡엔 사람들이 너무 많고 불편하다며 럭셔리한 호텔에서 먹고 마시며 수영장에서 즐기는 호캉스라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휴식 솔루션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위의 둘은 육적인 면에서는 좋지만 영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즐기는 것인데, 그 이름이 교캉스입니다. ‘교회에서 보내는 바캉스라는 뜻입니다. 주일이면 에어컨 시원하게 나오는 이곳에 와서 예배드리세요. 맛있는 밥도 공짜로 드립니다. 친절하고 반가운 사람들 얼굴도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충만한 은혜가 있습니다. 옆 사람과 인사 나눕시다. 우리는 지금 교캉스 중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모든 활동이 기획되는 생각의 출발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에 근심거리들이 자리 잡게 되면 그 인생은 삶의 목적과 의욕을 상실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14:1a)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Let not your hearts be troubled) 여기 보면 근심이란 단어가 영어로 ‘trouble’로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어는 타랏소’(tarasso)로서, 이는 물이 요동치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불안한 마음의 상태가 어떠함을 잘 표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음은 여러 근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에 한 사람이 당신을 팔게 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잠시 그들과 함께 하시지만 곧 헤어질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13: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제자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곁에 계신 주님의 도움이나 위로를 얻을 수 없고, 예루살렘 입성 때와 같은 영광을 기대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물론 더 이상 기도의 응답이나, 기적도 경험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불확실 가운데 던져진 제자들이 당혹스럽고 근심했을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다를까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불신앙에 사로잡혀서 더 이상 신의 현존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물론 미국의 버몬트(Vermont) 주에서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을 위법으로 정하고 있긴 하지만, 기독교 종주국을 자처하는 미국을 비롯하여 그 밖의 기독교권의 많은 나라들에서 파괴적인 무신론자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신론이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세상 가운데서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자연 재해(유럽의 살인적 무더위)와 인간이 만든 파괴적 무기의 위협 속에서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실한 채 근심과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낮에는 땀 흘려 일하고 수고로운 시간을 보내지만, 안식을 누려야 할 밤이 되면 근심의 포로가 되어 불면의 밤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과 약물과 심리 치료 등을 받지만, 일시적 위로를 제공할 뿐입니다.

그 밖의 잡다한 종교 명상이나 철학적 지혜들도 우리를 지배하는 이런 근심들에 대하여 피상적인 위로를 제공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근심들에 대한 궁극적인 처방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깨서 내려주신 근심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 3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A.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아들 예수를 믿으라(1)

우리를 위협하는 근심거리들을 만나면 이런 신학적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나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이런 근심거리들이 제멋대로 내 삶을 괴롭힌다면, 과연 개인과 역사를 섭리하는 신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하는 물음입니다. 혹은 이해가 안 되는 고통을 세상에 허용하는 신은 과연 선하고 정의로운 신일까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런 근심거리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b)고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숱한 근심거리들이 그치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여전히 존재하시고, 이런 현실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를 치유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경험하는 숱한 근심거리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역사는 영원한 혼돈이고 암흑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근심거리들이 아무리 파괴적이고 위협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그분의 선하신 섭리 안에서 이 근심거리들은 마침내 선한 결과들로 우리들에게 주어질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 변함없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임을 믿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역사와 개인의 모든 것을 계획하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허용된 고통이라면, 그 고통은 반드시 유익이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만 믿으라고 하면 되었지,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또한 믿으라고 하셨을까요? 그 예수가 바로 우리를 고통에서 건지실 구원자로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일차적으로 그분은 우리의 고통에 동참하시고, 그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장에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같이 읽겠습니다.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인간의 약함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근심거리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공감하시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근심 가운데 거하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예권이가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습니다. 고상하게 말해서 그런 것이고 한 마디로 고등학교를 중퇴했습니다. 그리고 상당 기간 동안 집에 있으면서 컴퓨터 게임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습니다. 그 녀석을 바라보는 저희 내외 마음은 시커멓게 타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아이를 우리에게 맡기셨을까?’하는 생각도 많이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요즘 들어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게임에 빠진 여러분의 자녀들을 부모들은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오징어게임 세대로서 그들과 소통하는 언어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피차에 외국어로 대화하는 것처럼 답답할 뿐입니다.

며칠 전 어느 부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 아들이 학교가 적성에 맞지 않아 중퇴를 하고 처음엔 공부를 조금 하더니 요즘은 게임에 빠져서 대화도 안 하고 걱정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예권이에게 했더니 그러는 겁니다. “그런 아이 걱정 없어요, 같이 게임 한 번 하면 마음 문 그냥 엽니다.” 어른이 제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자녀들은 라떼 취급하며 외면합니다. 소통 채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같은 세대, 같은 아픔을 경험한 예권이는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들어줄 수 있는 채널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수련회 출석을 거부하는 화평 3인방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연유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근심을 아시고 함께 아파하시는 주님, 우리가 겪는 고통을 함께 느끼신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에게로 초대하십니다.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신 예수께서 우리를 안식의 세계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처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래서 그분은 오늘 근심의 짐을 지고 신음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근심 가운데 있습니까? 근심의 에너지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에너지로 바꾸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아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신 주님으로부터 문제들을 해결 받고, 근심 대신 감사와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B. 아버지 하나님의 집이 예비 됨을 믿으라(2-3)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느끼는 딜레마가 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믿어도, 기도해도 해결되지 않는 근심거리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곧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믿지만, 그래도 경험하게 되는 견디기 힘든 일을 직면할 때마다, 언제쯤 이해할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일들이 변하여 축복으로 다가올 것인가를 묻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일 우리가 기대하는 세상이 이 세상뿐이라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약속을 신뢰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생은 반드시 생로병사의 과정을 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궁극적 의로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음 세상의 존재, 곧 내세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머잖아 이 세상을 떠나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4-16장은 마지막 십자가를 앞두고 바로 하루 전 다락방에서 행하신 고별 설교였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 이후에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믿음의 혼란과 회의를 겪을 것을 아시고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14:2-3)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본문의 약속을 우리를 위해 준비된 내세의 천국보다 단순히 주님과의 영원한 교제의 상태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옛 선배들은 공통적으로 본문을 명백하게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해 준비된 장소로서의 아버지의 집’, 내세에 가게 될 천당에 대한 약속으로 해석하고 믿어 왔습니다. 이 전통적인 해석, 곧 내세 신앙을 빼앗는 것은 인간에게 영원한 소망을 강탈하는 매우 불량한 짓입니다. 내세는 반드시 존재합니다. 내세가 존재해야 이 땅의 모든 모순과 근심거리가 비로소 완전히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은 하늘나라의 새아침을 여는 문과 같습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선물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이 거하게 될 영원한 아버지의 집인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합니다.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한 마디로 영원한 아버지의 집은 이 세상의 모든 고통, 모든 모순, 모든 아픔이 일거에 해결되는 곳입니다. 그 영원한 거처를 준비하기 위해 예수님은 죽음 건너편으로 가신다고 말씀하셨고, 그곳에서 우리를 만날 것을 약속하셨고 우리는 그 사실을 믿습니다. 이 아버지의 집이 지상에서 이 세상의 근심거리들에 대한 궁극적인 하나님의 처방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C.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임을 믿으라(5-6)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집, 곧 영원한 거처를 준비하러 가신다고 하니까 제자 도마가 도대체 그곳으로 가는 길을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14: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자기 선언(ego eimi, I am statement)을 하십니다.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인간이 죄를 범하고 타락할 때 잃어버린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둘째는, 참되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한 순간 거짓의 아비(8:44)인 마귀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인류는 진리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셋째, 죄를 범한 인류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되어 영원한 생명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을 통하여 아버지에게로 나갈 수 있다고, 예수님이 그 길이 되신다고 선언하십니다.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잃어버린 인생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심판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용서 받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인류의 조상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탄 마귀의 거짓말,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죽지 않고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을 믿고 그 열매를 먹는 순간 거짓의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예수를 믿으므로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므로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는 순간부터 우리는 영생,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방황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자동차 경주를 랠리라고 합니다. 랠리에는 두 명의 선수가 한 조가 되어 서로 다른 역할을 합니다. 운전하는 사람은 빨리 달리는 속도를 담당하고, 다른 사람은 가야 할 방향을 운전자에게 알려주는 임무가 주어집니다. 이렇게 운전자의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역할을 가리켜 페이스노트(pace note)라고 합니다. 아무리 빨리 달릴지라도 방향이 잘못되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본질적인 두려움과 비극은 소유의 빈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 즉 존재의 빈곤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지고 또 가져도, 즐기고 또 즐겨도 내면의 공허함을 채울 수가 없어서 방황하는 것입니다. 또한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두려움과 근심 속에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 인생길에 함께하신다면 근심할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들의 모든 방황, 모든 근심의 궁극적 처방입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진리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모든 근심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크신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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